Friday, November 17, 2017

스파이 이야기3 -요화(妖花) 배정자-한국의 마타하리

전에 썼던 글 들을 약간 정리 한 것임...공들여 읽을 가치가 있냐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임...... 이 정도에서 포기하고 빨리 돌아가도 절대 무리가 없을 듯..^^
(다른 곳에서 무단 거주지 이전!!을 씨킨 자료도 많으므로 저작권에 대해 심히 우려가 됩니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납니다.
아명은 분남(粉男). 그의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고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가 세 살 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 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는데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정병하(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안*수(安*壽)를 만나게 되었고, 다시 그를 통해 김옥균(金玉均)과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그를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 들여앉히고는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배정자의 '정자'는 여기서 생겨났다.

한편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정규 스파이 과정을 받은 것이라고 봅니다. 이토는 우리나라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손에 죽은 악당!!! 이지만 일본 측에서 보면 훌륭한 정치가에 수완가, 전략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94년 9년 만에 조선땅에 돌아 옵니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 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 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상주한 바 있다. 양장(洋裝)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遷都)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출중한 미모와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 총애받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退位)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됨(10월 26일)으로써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 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 현 瀋陽)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 귀순공작을 담당했다.

1920년 일제는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하는데 그는 배후인물로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 초대회장 최정규(崔晶圭)는 구한국 시절 참위(소위) 출신이었다. 매국노 이용구(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이토오히로부미의 사진..


70 노구로 '군인위문대' 조직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배정자를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1922년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백여 평의 토지를 증여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민간업자의 부탁을 받고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 1백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업자로부터 금품을 챙긴 것은 불문가지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비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따르면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 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 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 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여기 저기서 자료를 가져 온 것이 있어서 무단 복사로 항의가 있으면 삭제 합니다)


배정자 관련 영화 포스터..1966년도 작 김지미 주연...
1973년도 작은 윤정희씨가 주연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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