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라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3개의 유리창
나에게 있어서 인생에 영향을 준 사람들을 이야기 하라면 아마도 먼저 미야자키하야오 감독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행동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존경하는 사람을 이야기 하라면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어린시절 충무공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에디슨 등으로 이야기 되던 그 시절의 위인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기 시작한 이후 나에게 있어서 제일 존경하는 인물은 나의 아버님이었다.
성장기에 있어서와 청년기 초기에 어려웠던 집안의 여러 가지 환경에도 정말 말없이 모든 것을 묵묵히 처리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무엇보다도 강하고 굳건한 아버님 나름대로의 신념에 대해서 많은 감탄과 존경을 지금껏 가져오고 있다. 이렇게 존경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정말로 아쉽고 속상한 몇 가지의 일들이 아버지와의 기억 속에 남아있고, 공교롭게도 그중의 중요한 기억 몇 가지가 유리창과 관련되어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버지의 성격을 이해하게 되는데 도움도 되었지만 어찌 보면 아버지께 가장 섭섭했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유리창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그보다 조금은 어렸을 적 시기의 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 길다란 골목길 안쪽의 강원도 강릉의 임당동에 살 시절의 기억이다. 그 무렵의 집이나 옛적 집들에는 대부분 부엌과 안방을 통해서 작은 유리창문이 달려 있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내가 살고 잇던 집 역시 마찬가지로 안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작은 창이 있었다. 대부분 음식 등을 운반하거나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지금의 가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어느 여름 무렵의 오후라고 생각이 된다. 식구들과 같이 한창 놀고 분위기가 무루 익을 무렵 맛있게 먹고 있던 사탕을 아버지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 했던 나는 그 커다랗고 단단한 사탕 한 알을 가지고 있던 장난감 권총에 올려서 벽에 기대어 앉으신 아버지의 입을 겨냥하고 쏜 것이다. 사용된 흉기(?)는 당시 유행하면 미사일 모양의 긴 총알을 발사하는 상당히 강력한 스프링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나의 미숙한 겨냥 실력으로 빗나간 총알 사탕은 아버지의 얼굴을 지나쳐 벽에 달린 음식 운반용 유리창을 맞추고 말았다. 강력한 총의 힘과 단단한 사탕의 조합은 결국 산산이 깨어진 유리창과 정말 무섭게 혼난(나 때문에 덩달아서 같이 혼난 형님과 동생까지......)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사탕을 드리고자 했던 갸륵한 효심은 비록 깨어진 유리창과 무섭게 혼난 어느 날의 오후 기억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어린시절 몇 번안되는 상당히 많이 혼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일년 365일 아주 조용조용히 사는 성격은 아니었던 탓에 가끔은 엉뚱한 장난으로 보낸 어린 시절이었다.
두 번째 유리창의 기억은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라고 기억된다. 그래도 2층으로 되어 있는 슬라브 집에서 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생일파티라는 것이 있었고, 그래도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서 같이 모이는 즐거운 만남들이 있었다. 1970년대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당시에도 과외가 있었고,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위한 상당히 힘겨운 공부에 대한 부담감도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여하튼 그해의 내 생일날 부모님의 준비로 생일상을 차릴 수 있었고 여러 친구들과 즐거운 식사와 식사후 놀이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아도는 것이 힘밖에 없던 어린 시절 우리들의 장난은 패를 나눈 몸싸움 비슷한 형상을 띄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장난이 2층의 방에서 마루로 이어지는 순간 2층 베란다로 나가는 커다란 유리창을 와장창 깨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덕분에 밤늦게 계속되면 생일 파티 뒷자리는 금방 정리되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도망 가버린 친구들 뒤에는 갈데없는 3형제만이 또 남아서 벌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 기억으로 유리창을 갈아 끼우는 값을 내 통장에서 처리하기로 하고 야단을 맞으면서도 내 통장 돈으로 유리창까지 갈아 끼우게 되었는데 이제 그만 좀 야단치시지 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리면서 야단을 맞던 기억이 난다. 잘못했다는 사과와는 별도로 유리창 값을 변상하고 그리고 생일날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선이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먼저냐는 아버지의 기나긴 책망과 조금은 여러 가지로 서운했던 그때의 심정은 지금도 마음한 구석에 남아 있다.
참고로 조금은 엉뚱하지만 기타 하나를 사기위해서 한달 2700원의 적금을 1년 동안 들어서 돈을 마련한 기억을 중학교 시절에 가지고 있는 나는 그러한 성장 환경 탓인지 지금도 없으면 안 쓰면 되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평생의 기본적인 생활 태도로 삼게 된 것 같다. 덕분에 이제는 내 아이들에게도 매주 용돈을 주면서 구두쇠 역할을 하는 내 모습이 왠지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간다는 것을 가끔은 느끼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세 번째로 유리창에 얽힌 기억은 거의 성년이 된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그 나이되어서 무슨 유리창을... 할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 나이에도 유리창을 깨고 있었다. 부모님이 지으신 팔복동 집에 살고 있던 대학생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개밥을 주기 위해서 냄비를 들고 나가는데 냄비가 무거운 탓인지 뜨거운 탓인지 양손으로 감아쥐고 현관문을 열수 있는 손이 없던 나는 그냥 무심코 유리로 되어 있는 현관문을 엉덩이로 밀어서 열려는 아주 무모한 시도를 하고 말았다. 엉덩이의 힘이 너무 강한 탓인지, 아니면 추운 날씨 탓에 유리창이 약해진 건지 모르지만(난 지금도 기필코 후자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유리창은 와장창 깨져 나가고 두 손에 개밥이 든 냄비를 들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게 된 것이다. 더불어서 들려오는 아버님의 야단치는 소리와 함께.......
정말 서운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었다. 유리창이 깨졌다면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먼저 물어 보고 나무라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일단 아버지의 성격상 야단부터 치시는 것이 순서였던 것이다. 한참을 혼내시고 난 후 말씀하시는 야단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유리를 테두리가 아닌 한 가운데를 몸으로 미는 어리석음에 야단을 치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 미련함에 야단치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미련한 자식은 다쳐도 야단부터 맞아야 하는지 하는 서운함이 정말 강하게 남았던 기억이었다. 다행히도 아마 유리값을 물어내라는 이야기는 안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후로는 유리창을 깨거나 아버지께 많이 야단맞거나 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의 급하신 성격이 집안의 내력이고 역시나 나도 동일한 성격이라는 것을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절실히 느낄 수 있었고, 나의 자식들이 자라면서 야단치는 일이 생길 때면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이 역시나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혼자 웃음 짓게 하고 있다.
자라면서 때로는 서운하고 때로는 속상하고 때로는 기뻤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남아있지만 아버지와 연관되어 남아 있는 유리창과 관련된 일련의 기억들은 아마도 유리창이 깨어지는 강한 기억과 함께 더 명료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유리창을 깨도 누가 크게 야단칠 일도 없을 것이고 아버지께 야단들을 일도 없을 것이지만 돌아보면 정말 귀한 기억이고 그 시절 그 순간들의 소중함을 당시에는 너무나도 몰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조금은 나를 서글프게 한다.
이제는 많이 정말 많이 부드러워지신 아버지의 성격이나 손자들에게도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가 내 아이들이 유리창을 깨면 나는 먼저 어디 다친데 없는지부터 챙기고 놀라지 않도록 잘 대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나도 역시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고 마찬가지로 나도 설사 양손에 개밥 냄비를 들고 깨진 유리창 사이에 서있더라도 일반 야단부터 치지 않을지... 나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므로...
아버지의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아버지의 아들 둘째 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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