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2, 2022

 

폭탄의 발달! 댐 공격 그리고 전설과 숨겨진 이야기 



포탄은 아무나 사용합니다. 하지만 폭탄은 공군만 사용합니다.
이것은 공군이 프라이드로 내세우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사실 대량의 폭탄이 사용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 절정일 것이다. 물론 한국전과 베트남전의 융단폭격 등이 있었지만
동원기체 숫자면과 기간에서 본다면 비교가 안되고 그 이후로는 pin point 라고 불리우는 정밀 공격의 효과가 
입증되면서 전체적으로 전쟁의 형태와 이에 따른 폭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당시의 폭탄을 보면...

위 사진의 폭탄들은 2차대전시 영국 공군이 사용하던 폭탄들을 찍어 놓은 사진이다. 일단 무게에서 한 덩치 함을 볼 수 있다.
F-15등에 사용하는 가장 크다는 2,000 파운드 폭탄이 한쪽 구석에 밀려 있고, 8,000 파운드, 12,00 파운드 에서 심지어 22,000 파운드
폭탄도 볼 수 있다.
특이하게 12,000 lbs, 22,000lbs 의경우 Tall boy, Grand slam 이라는 이름이 붙어져 있다(오늘의 주제 중 하나 아래에서 설명)

아래 사진이 공군 F-15에서 사용한 BLU-109 2,000lbs(998Kg) 폭탄이다. 이 정도 화력이면
실제 투하시 수 Km 밖에서 충격파가 몸을 흔들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직접 느껴보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이런 2000 파운드 폭탄과 위 사진을 비교해 보면^^ 당시의 폭탄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에 이야기한 Tall boy, Grand slam 라는 폭탄은? 혹 여기에 관련된 일화를 아시는지?
이 폭탄에 대해 잘 모른다면 아래 사진은 혹시 아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밀리 매니아라면 대부분 아실 듯)

Operation Punishment !독일 루르 지역의 공업지역을 상류에 위치한 댐을 폭파시켜 수장 시켜버린다는 바로 그 영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폭탄. 바로 댐버스트, 공식명칭 MINE Anti-DAM 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5개의 댐을 물수제비를 뜨는 특이한 폭탄으로 공격하는 장렬한? 영화이다
장렬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실제 공격에 나선 19대의 폭격기 중 8대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승무원 56명 사망)
--- 여담으로 영화 말미에 보면 엄청난 손실에 놀라서 이 공격에 사용된 폭탄을 만든 사람이 후회하는 듯한 언급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

실제 목표 중 2개의 댐만이 공격에 성공했고, 1년은 걸리리라던 공장의 복구도 단 3개월만에 해결되었다. 
연합군에 위안이라면 더 많은 대공포와 건설자재들이 루브 지방으로 이동해서 노르망디 상륙에 다소 도움이 되었다는 점 정도이다.

아래 사진은 좀 귀한 사진으로 폭격으로 인해 부셔진 Moehne Dam의 모습이다. 
(흑백 복사기로 책을 복사해서 다시 스캔한 것이라 화질이 좀...ㅜ.ㅜ.. 도서관에서 책 빌려오기 귀챠니즘에...)

왜 이런 공격을 했는지 본다면 당시 폭탄의 성능 기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댐 주위에 설치된 대공포와 댐 안에 설치된 다중의 그물에 의해서 (해군도 비슷한 특성의 어뢰 방어망을 사용했다) 일반적인 공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독일애들이 다 IQ가 낮은 것이 아니었으니...) 여하튼 이러한 물수제비 방식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밀리매니아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으로 자세한 설명은 건너 띈다(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8845&page=497 이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영화속 사진을 몇장 추가해 보면

2중 라이트를 이용한 고도조절, Y자 모양의 막대를 이용한 거리 측정 등등 정말 많은 아이디어가 동원된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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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오늘의 숨겨진 이야기는 바로 이 작전에 사용된 특수한 도약 폭탄, 
Bouncing bomb-Dambuster 를개발한 Barnes Wallis라는 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제 이분은 이름 앞에 Sir 라는 칭호를 붙이는 영광을 가지신 분이시다.
(영화 마지막에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분!)
이 Barnes Wallis이란 분은 바로 처음에 설명된 Tall boy, Grand slam라는 폭탄도 개발한 유능한 사람이다.
즉 대부분의 폭발력이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여 화력을 증대시킨 폭탄을 만들었고, Bouncing bomb 를 만들어
댐을 공격한 사람이다.
영화속 사진으로 뒤에 보이는 사람이 Barnes Wallis 이다(영화 배우 이름은 건너띔)

Barnes Wallis의 실제 모습이다
영화속 인물과 닮았는가?





이 Dr + Sir Barnes Wallis는 이러한 폭탄이외에도 많은 것을 발명한 천재적인 사람이다.

그는 Geodetic design 이라는 기법을 발명해서 이를 기초로 R-100 이라는 비행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Geodetic design 은 이러저러한 이유로(전문적인 부분 skip^^) 구조물의 강도를 증대시키고 무게를 감소시키는 기법으로
영국 웰링턴 폭격기에도 사용 되어진 방식이다. 아주 유용한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 Geodetic design 방식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당시의 만화이다.


그런데 더욱더...놀라운 것은 

Dr + Sir Barnes Wallis는 위에 언급한 다양한 폭탄 이외에도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바로!!  변익기 SWING WING의 시초를 이룬 사람이다  와우!!
(참조 http://www.barneswallistrust.org/)
이 사람은 2차 대전 이후에도 지속적인 연구를 계속 하였다.



위의 사진들은 노년의 그의 모습과 그가 설계한 가변익기에 대한 모델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많이 퇴보하였다고 하지만, 영국의 여러 기술력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Barnes Wallis 같은 사람의 경우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2차대전의 폭탄, 그리고 댐버스터, 폭탄 개발의 천재, 그리고 이 천재가 만들어낸 가변익기.....
(도서관에서 거꾸로 찾아들어간 것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뭐 좀 부족하지만 이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 분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에 보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

Barnes Wallis - a Genius  !!! .....                                        I think so...^^;





 타라와 전투의 숨겨진 이야기들

타라와 전투는 2차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미드웨이 전투와 과다카날 전투등을 거쳐서 반전을 시작한 미군이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하는 첫걸음에 해당하는 전투였다.
1943년 11월 20~23일 까지 정확하게는 76 시간 정도 걸린 전투에서 1,000여명의 전사자를 기록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오지마등과 함께 손꼽히는 피를 부른 전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치열했던 전투 과정에는 흔히 그냥 지나치기 쉬운 몇가지 군사적 역사의 시작점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숨겨져 있다. 워낙 치열한 전투에 연이어진 다른 태평양 전쟁의 수많은 전투에 의해서 묻혀 버렸지만 사실 밀리터리 역사에 매우 중요한 시발점들이 되었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몇가지를 지금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1. 해병대 항공대의 독립적 전술허용
과달카날등에서도 시작된 문제였지만 해병대는 해군 항공대의 지원에 대해서 높은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직접 항공대를 통제하기를 원했다. 상륙작전시 근접 항공 지원을 해군이 아닌 해병 항공대가 직접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통제를 하려면 그 범위안에 해군의 항공모함들이 포함되어 버리는 바람에 해군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결국 초반에 항모를 통한 공중지원, 그리고 해병대가 활주로를 만들거나 차지하게 되면 이를 이용한 해병대 항공대의 운영으로 결론을 내게 되었다.
결국 해군 항공대에서 독립된 해병대 항공대의 독자적 운영이 시작된 전투가 바로 타라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술적 운영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와서 각종 상륙함의 운영과 해리어, F-35B와 같은 기종의 운영 등으로 해병대 항공대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런 대규모 해병 항공세력을 운영하는 군대는 지구상에 거의 희귀한 수준에 불과한다.^^
2. 상륙장갑차의 활용
미군의 경우 2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오랫동안 태평양 전장을 대상으로 하는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연습하고 있었다. 먼 거리를 항해하여 적이 방어하는 지형에 상륙하는 상황을 고민했고 다양한 전장 상황에 따른 전술을 개발하고 이에 따른 선박을 설계 제작하였으며(물론 제작 과정에 관련 기관들끼리의 충돌은 상당히 심했었다) 이를 토대로 다양한 발전형 선박들을 제작해 내기도 했다. 이런 선박들은 최종적으로는 2차대전 종전시기까지 제작이 마무리 되지 않은 선박들도 있었고 대부분 종전 후에 민간에 이전 되었다. 더불어 개발된 여러종류의 보트와 상륙용 선박들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일꾼으로 투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다양한 상륙정들은 태평양의 환초라는 복병에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된다. 일반적인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에 상륙하는 방식의 상륙함들은 환초라는 지형에 대하여 태생적 한계를 느끼게된다. 이러한 환경의 문제를 인식한 해병대 내부의 고민은 커져만 가고 있었는데, 과달카날 상륙작전때 선보인 LVT(landing Vehicle Tracked) 에 대한 기억을 당시 2해병사단의 작전 참모로 있던 David M. Shoap 중령이 떠올리게 된다. * David M. Shoap 중령은 나중에 장군으로 진급하면서 명예 훈장을 받은 참전 군인이 되며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해 저명한 저술가로 유명해진다.



LVT는 사실 민간에서 늪지용으로 개발된 형식의 차량으로 이를 군용으로 도입하였지만 강화된 방어나 무장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않고 있었다. 타라와 전투를 통해서 방어용 장갑과 무장을 갖추게 된 상륙 장갑차 LVT의 등장은 상륙작전에 생존성과 더불어 수송면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환초에 의해서 많은 상륙용 보트들이 1km 밖의 거리에서 병사를들 내려 놔야만 했고 심지어 각종 보급물자의 수송에도 많은 어려움을 가져 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에 LVT를 거론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바다위에서 장비를 싣고 발진해서 해안가에 병력을 내려 놓는 방식이 아닌 직접적으로 육상으로 올라가서 전투를 치룰 수 있는 방식의 상륙용 장갑차는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개발과 업그레이드를 거쳐서 지금의 해병대에는 둘도 없는 필수 장비로서 자리 잡아 사용되고 있다.
3. UDT, Nay SEAL의 시작
LVT가 활약하게 된 것은 태평양 환초라는 지형적 특성 이외에도 당시 상륙장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 의한 험난한 과정이 배경이 되고 있다.
당시에 미군이 사용했던 해도는 100년이 넘은 1841년에 제작된 해도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호초와 수심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하였지만 일반적인 상륙함이 요구하는 120cm의 수심을 간조시에도 유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참모들 사이에서 유지 되고 있었다. 해당 해역에 대해 정보를 아는 소형선박의 선장들이나 해당 지역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상륙작전을 위해 수로도가 작성 되었다.타라와 전투의 해병대를 총 지휘할 해병 2사단장인 스미스 소장마저도 작성된 수로도를 바탕으로 수심 120cm 정도의 수심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작성된 수로도는 15년간 타라와 환초지역에서 살았던 뉴질랜드의 예비역인 홀랜드 소령에 의해 의문이 제기 되었다. 홀랜드 소령의 판단으로는 상륙작전이 시행되는 날짜는 조금때로서 (** 조금은 물의 이동이 적지만 수위의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시기이다. 반대로 사리때는 물의 이동이 많고 최고 수위와 최저 수위의 차이가 많이 발생한다=> 낚시에 반드시 참고해야 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 편집자 주) 수로도에 표시된 사리를 기준으로 하는 수심과는 차이가 날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상륙작전시에 충분한 수심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이 결과로 결국 LVT들의 활약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일반 적인 상륙용함정들과 달리 LVT는 달려있는 궤도를 이용해서 환초지대를 타넘어 갈 수 있었다)
결국 곤란해진 해병대 참모팀은 수로도를 작성한 사람들에세 홀랜드 소령의 의견을 첨부해서 다시 질의를 했는데 돌아온 답변이 조금때라도 그 정도 수심은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볍이었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지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내용이다. 보통 낚시를 가게 되면 첨단 장비와 화려한 복장을 착용한 낚시꾼들의 조과가 반바지 입고 슬리퍼 끌고 온 현지 낚시꾼의 조과에 비할바가 없는 경우가 많다. 새겨 들러야 한다. 현지인이 진리다!!- 편집자 주)
여하튼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스미소 소장마저도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작전에 동행한 종군기자에서 산호초에 내래서 걸어서 상륙하게 될 확률이 절반쯤 될 것 같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절반도 상당히 후한 점수가 되고 말았다.
결국 전투 종료 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전에 상륙지점에 투입되어서 각종 정보를 얻어올 특수부대의 활용이 요구되게 되었다. 이미 다른 전투에서도 비슷한 역할의 부대들이 활용되었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는 쉽게 받아들여 졌다.


David M. Shoap (타라와 당시 중령) 장군. 명예 훈장도 받은 뛰어난 전쟁사 저술가이기도 하다.


결국 UDT 수중폭파팀이라고 불리우는 팀이 만들어 졌는데 이러한 명칭은 초기 대원들이 대부분 해군 건설대에 속해있던 병력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부대는 사전에 상륙지역에 침투하여 해저 지형을 조사하고, 수심을 측량하고 작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사전 폭파해서 처리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개구리맨들이라고 불리우던 이 UDT 부대는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왔고 현재는 네이비실이라고 불리우는 SEAL 팀으로 그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이야 공중.지상.해상을 가리지 않은 전전후 특수부대가 되었지만 (훈련 과정에는 몸으로 때우는 과정뿐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머리쓰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SEAL 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륙지점의 수심을 재고 폭약을 설치하던 개구리맨들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타라와 전투는 이 외에도 물건 수송용 팔레트의 적극적 도입. 기습작전을 배제한 체계적인 상륙전 포격, 보다 강력한 근접지원 항공기의 폭탄요청으로 네이팜탄 도입 등등의 여러가지 전술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 전술의 역사상 무척 중요한 배경이 되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전에서 이 정도 대규모 상륙작전이나 해병대를 운영하는 나라는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많은 전술적 기술들이 이 타라와 전투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기억해 볼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출처 : 구글 맵. The Pacific War Companion(From Pearl Harbor to Hiroshima), 미 해병대 공식 사이트 몇군데...

 Know What의 군사학


오래전에 국방일보에 Know When의 군사학이라는 글을 올린적이 있었다.
시대적 발달사로 본다면
 Know How
Know Where
 Know When
 Know What 의 순서로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나온 용어 중 하나가 Know How 였다. 누군가 남들이 모르는 기술을 가지고 있고 자기만의 비법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남들은 모르는 보다 유리한 장점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산업화가 되면서 조금씩 Know Where의 시대가 되어갔다. 어딘가에 있는 자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그걸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강한 장점이 되었고 이걸 바탕으로 남들보다 유리하게 사업을 하거나 세상을 앞서 나갈수가 있었다.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Know Where의 시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네트웍에 널려있는 무수한 자료들을 찾기 위해 각종 검색 엔진들이 나타나고 이를 활용하는 각종 정보 검색대회등이 열리기도 했었다. 그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Know When이었다. 즉 정보는 찾으면 나오고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걸 누가 먼저 알게 되냐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정보 검색 대회도 시간으로 다루기도 하였고, 남들 보다 빠른 정보를 아는 것이 각종 비즈니스나 세상사는데 엄청난 이득이 되고 장점이 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모르는 입시정보나 각종 취업 정보등은 점차 사라져 가는데 대신 이 정보를 누가 언제 먼저 아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밀리터리에 반영한 것이 Know When의 군사학이었다.
전장의 정보나 상대방의 전략 군사력 등등의 이러한 정보를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언제 아는가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전장의 병사가 접하는 정보가 다른 모든 곳, 지휘 본부나 지원부서 등에 전달되는 시간의 중요성이 점차 무게를 더하게 된 것이다.
당장 걸프전과 이라크 전에서 목표를 획득하고 이를 타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의 차이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이러한 흐름은 전장의 정보를 일선 병사에서 최고 지휘부까지 전달하는 시간이 8초 이내에 이뤄져야 한다는 식의 접근도 한 몫을 한것이다.
링크 16과 같은 데이터 통신도 이러한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투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전투기의 각종 정보가 사전에 통보되어서 무장이나 보급을 위한 준비가 착륙전에 이미 준비가 된다거나 수리를 위한 준비를 사전에 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도 사실 이러한 시간의 요소에 해당된다.
이러한 정보의 흐름은 전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는 점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빠른 정보 습득을 위하여 위성통신이나 무인기와 같은 정보자산, 초고속 통신망 등등의 시스템이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이건 현재 진행형도 아니고 과거형 표현이다. 이미 기본 기준이 된 것이다)
자~ 그 다음이 요구가 되는 것이 Know What이다.
물론 아직 이정도 레벨이 접근한 나라들은 많지 않다.
각종 정보자산의 발전으로 엄청난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물론 이건 그 레벨에 접근한 국방력을 가진 나라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러한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이러한 정보 중에서 진짜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야 하고 내가 보는 정보가 진짜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된 정보인지도 확인해야할 필요도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퍼즐을 맞추듯이 원하는 정보, 가려진 정보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빠른 시간에 그걸 해내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한 정보에 대해 우선권을 부여하고, 중요도를 지정해서 처리해야 하는 것도 전장의 승패를 갈리게 하는 조건이 된 것이다.
한국 같은 경우 오산의 미군기지가 대표적으로 그런 정보가 모여드는 곳이다. (MCRC + ??) 미군이 취급하는 여러가지 정보가 다 모여드는 기지 5개 중 하나이고, 미국 본토 이외에 존재하는 2개의 기지 중 하나이며 실질적인 전투부대를 통제하는 유일한 기지라는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 브리핑 받은 것이라 지금은 다를 수도 있다)
여하튼 실시간으로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시대에 있어서 쏟아지는 각종 정보 중 유용한 정보를 찾아서 내가 필요로 하는 자산으로 바꿔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승리의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에 대한 고민은 실시간으로 각종 전장정보 및 관련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여서 전군에 빠르게 전파시킬 수 있는 군대에서나 할 수 있는 있는자!의 고민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각종 정보를 수집해서 실시간으로 처리하고 이 많은 정보들 중에 필요로 하는 정보를 골라서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고 이것을 바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의 차이점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그 수집을 실시간으로 처리하고, 그 정보들 중에 유용한 것을 찾아내고 평가해서 적용하는 것이 현대전의 핵심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전쟁터에서 보고있다.
물론 우크라이나군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 거론한 Know When과 Know What의 방식을 적용하는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의 차이가 현재의 전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기본 베이스가 되는 화력이나 개인 전투력, 무장, 보급 등의 요소를 간과할 수는 없다. 그건 아주 기본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하지만 그런 기본이 갖춰졌다 하더라고 위에 이야기한 요소를 동반하는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의 실제적 전투력은 비교할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 화력등이 부족한 경우라 하더라도 Know When, Know What의 정보력이 지원된다면 그렇지 못한 군대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한 전쟁 현장을 이제 우리는 실시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국방이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대전략이 존재하는가?      5.2022

국방은 왜 흔들리고 무엇이 문제인가?
이번 예산 반영에 결국 복지 예산등을 위해 국방 예산이 짤려 나갔다.
왜 언제나 국방 예산은 뒤로 미뤄지고, 장병들의 처우개선에 대해서는 지지부진하고, 더불어서 병역에 대한 명예나 자존심, 존경심도 없이 할수만 있다고 안가고 만다 하고 예비역까지 권장하는 그런 병역이 되어 버렸을까?
첫째 병역의무에 대한 불평등이나 이런 저런 제반 사항을 떠나서 일단 국가 대전략이 없다.
이제는 통일을 국시로 한다거나 반공을 최우선하던 그런 시기도 아닌데 국방력을 키우고 유지해서 뭘해야 하겠다는 명확한 전략적 목표가 없다. 무슨 무기를 사고 장병 월급을 얼마를 주고, 군가산점을 주고 안주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국방력이 왜 존재하고 그걸로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 구석지에 박혀있는 활자화된 문구에 불과할 것이고 국민 누구나가 동감하고 지지하는 그런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라갈 산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오를지에 대한 명확한 방법이 나올리가 없다. 그러니 맨날 밀리고 관심받지 못하고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국적 정서에 그냥 적당히 좋은걸로 알아서~~ 이런 부분이 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대학교 기숙사를 정해야 하는데 선택칸을 잘못해서 기숙사 배정을 못받을뻔한 사례를 본적이 있다. 남녀 같이 쓰는 층이냐 아니냐부터, 창쪽이나 복도쪽이냐 몇층이냐 등등의 자세한 선택 옵션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그냥 상관 없음 알아서 주세요 하는 식으로 옵션을 선택하다보니 자기 의사를 명확히 밝힌 학생들부터 방을 지정해서 결국 최후로 밀려서 하마터면 방을 배정받지 못할떤 했던 케이스다.
의외로 동양적 사고에는 그런 부분이 강하다. 뭐가 목표인지 명확하게 하고 그 방법론을 정하고 1장. 2장. 3장 하고 나가야 하는데 좋은게 좋은 것 두리 뭉실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둘째 대전략이 없다보니 생기는 결과지만 각군의 명확한 목표치가 없다.
솔직히 육군은 화력이나 이런저런 전투력이 객관적으로 북한에 밀린다고 평가되지 않는다. 밀린다고 하면 아마도 화를 낼 군고위층들도 많을 것이다.
해군의 경우 전투력 비교가 사실 많이 우습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함인지 정인지 구분되기 애매한 전투함으로 해서 차이가 많이 나는게 사실이다. 북한의 위협으로 잠수함 세력을 이야기 하지만 현재 한국의 잠수함 숫자는 적은게 절대 아니다. 신형 3천톤급 잠수함을 추가 양산해서 27척 체계로 가게되면 해군 전투력 랭킹 탑 순위를 달리는 일본보다도 잠수함이 현역 운영 숫자가 더 많아지게 된다.
공군은 기체 성능상 비교 불가의 위치에 있다. 물론 수량과 노후 기종들의 문제가 있지만 덕분에 전력 증강 예산 확보에 반대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매번 끌고 들여오는 것이 주변국 대비? 라는 어정쩡한 전력 대비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강한 육군이나 대양해군이건 하늘로 우주로건 뭔가 슬로건들은 마구 만들어 내는데 실제적으로 명확한 전력 증강에 대한 목표치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매번 달라지거나 그 목표치가 국민들에게 재대로 홍보되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각종 전력 증강사업이나 예산 부분에서 매번 문제가 생기고 밀리고 하는 일들이 생긴다.
세번째로 홍보와 비밀주의 부분이다.
미군의 경우 각종 에어쇼나 기지공개 행사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국민의 세금을 어떻게 쓰는지 보고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한국군은 어떤 마인드로 국민들에게 다가서고 있는 것인가?
예전에 국방부에서 방사청등을 만들기 직전에 예산확보 부분을 위해 국회와 해외 부분을 담당할 전문 인력을 뽑아 새로운 팀을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다. 당시 면접에 나온 질문 중 하나가 어떻하면 예산확보를 잘 할 수 있을까? 였다. 그때 개인적으로 했던 대답이 “전 예비역들이 군대가 정말 돈을 아끼고 절약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공감하면 아주 쉬운 일이 될 것 입니다”라고 햇던 기억이 난다. 더불어서 공개할 것은 과감하게 공개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야 가능하다는 점을 추가 했었다.
무기 생산이나 전력 증강, 각종 사업 등에 대해서 제대로된 이해와 홍보 그리고 사후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 힘든게 현실이다. 정작 일선에서 원하는 제품과는 전혀 다른 조잡한 것이 납품되기도 하고, 전력 증강과 방위력 확보가 목표인데 실제로는 국산화가 목표인듯 등장해서 각종 전투력 증각 사업들을 비비 꼬이게 만들고 있는것도 현실이다.
최근에 사용되는 각종 무기들은 2차대전같이 싸우면서 생산해 쓰기는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다. 국산화 만능을 외치면서 유사시 만들어서 써야 하니 어쩌니 하지만 결국 그거 생산할 시간조차 제대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서 동맹군과의 호환성이나 이런 저런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이제 독자적인 무기 체계나 호환성 문제가 있는 장비들의 사용은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도 이런 점들은 무시할 수 없는 기본 옵션으로 들어나고 있다.
위에 이야기한 3가지 지적의 상당수는 사실 군대 내부의 책임에서 발생되고 있는 것이 맞다.
제대로되지 못한 정보나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흔들리는 사업이 너무나도 많고 정치적 이유로 타협하거나 말도 안되는 조건에 대한 사전 항복으로 결국 그 모든 결과가 국방력 약화라는 치명적 결론으로 달리게 만들어가고 있다.
왜 국방예산이 짤리고 복지 예산을 위해 난도질 당하는지, 좋은 무기를 빠르게 살 수 있슴에도 불구하고 퀄리티가 더 떨어지는 무기를 더 비싸게 늦게 늦게 도입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점들의 상당수는 군대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게 맞다.
상부의 눈치를 보거나 각종 거짓으로 만들어지는 보고사항이나 그냥 했다고 치고~ 하고 넘어가는 훈련이나 보고 등등의 형식적인 문제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왜 그걸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군대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국가 정책이나 정치적 상층부의 인식 문제가 심각하다.
이제는 나를 따르라 하면 무조건 따르는 시대가 아니다. 왜 따라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건지 무엇을 위해 가는건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이해 시키고 끌고 나가는것에 있어서 이러한 부분이 아직은 너무나도 미흡하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 해결책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건 절대적으로 아니라 생각된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이미 알고서도 의지의 부족, 문제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해결 못하고 있다고 생각될 뿐이고
사실 그러한 현실이 더 답답한 따름이다.